수필가방

돌아오지 않는 강/ 우희정

청개구리 2021. 2. 16. 17:13

                                                                                                                                                                                                 출처: 뉴시스(다음갤러리)

 

  돌아오지 않는 강

 

   좌석을 배정 받고 시간이 남아 공항 전망대에 올랐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바깥 풍경은 내 기분과는 다르게 다분히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좌측 하늘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가까워지던 별이 두 개의 작은 별을 거느리더니 형체를 드러낸다. 착륙하는 비행기다.

   익숙해져 있던 것에서의 탈출, 미지를 향한 호기심으로 가슴이 설렌다.

   가을은 어딘가로 막연히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그러나 여행은 돌아올 곳이 전제되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우리 모임에서 항상 싱그러운 웃음을 보여주던 한 남자가 이 가을 속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추억을 남기고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 떠난 그는 영영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은 우리는 눈물 흘리고 애절해 했지만 정작 그는 말이 없었다.

그가 떠나고 난 뒤 나는 내내 우울하여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길을 나섰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다.

   1시간도 안되어 비행기는 고향 근처 공항에 날개를 접었다.

   객지의 여관방에 누워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또 한 사람,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내 정신적 지주이던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겐 크나큰 슬픔이었다. 나를 지탱해 주던 기둥 하나가 넘어진 듯 견디기 힘들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말을 위안 삼는 사이 시간은 흘러 나는 차차 일상으로 돌아왔으나 이런 계절이 오면 다시금 아픔이 솟곤 한다.

   사랑의 환희도 이별의 슬픔도 처음과 똑같은 느낌이라면 필시 미쳐버릴 것이라고 누군가 얘기했었다. 인간에겐 이렇듯 시간이란 묘약이 있어 슬픔의 빛깔을 옅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할아버지가 계신 동네를 찾아 들었다.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다 꺾어들던 옛길은 새길에 밀려 연인들의 드라이브코스로나 이용될 뿐 한적하기 그지없다. 정적감 묻은 바람 한 자락이 지나가며 낙엽을 떨어트린다. 내려다뵈는 아래 새로 뚫린 터널 속으로 무심히 차들이 빨려들고 있다.

   내리막길을 지나 좌측 좁은 길로 들어서자 이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망자들이 오밀조밀 모여사는 동네. 초가를 연상하는 낮은 봉분들이 촘촘히 들어앉아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오랜만에 들렀더니 비바람에 씻긴 무덤이 더 낮아 보인다. 앞산을 물들인 단풍색깔이 처연하도록 아름답다.

   봉분 사이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넉넉하게 품어 안는 가을 햇살이 따스하다. 가라앉는 기분을 추슬러 주는 하얀 새털구름의 아늑함에 취해 스르르 눈을 감으니 저승인가 싶고 살포시 눈을 뜨면 이승이다. 삶과 죽음이 바로 이런 것일까.

   두고 떠나온, 내가 살던 도시의 한 풍경이 떠오른다.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건너편에는 택시기사들의 쉼터가 있다. 말이 쉼터이지 그곳은 본시 화장실이다. 화장실 벽을 의지해 커피장수가 있고 단골인 그들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컵라면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하필 화장실 앞인가 하겠지만 언필칭 담장 너머는 영안실이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과 사가 갈린다. 어둠의 저쪽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아랑곳없이 담장 이쪽의 사람들은 사는 동안 열심히 살아간다. 그들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올 수 있는 강’을 넘나들 수 있으므로 느긋한 것이다.

   죽음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생을 마감하는 날 내가 태어날 때 떠나온 그곳, 저승에 돌아갈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의 내 자리는 바로 도시의 한 귀퉁이, 내 가족이 날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

   나는 그동안 수없이 한강을 넘나들었다. 사는 것에 의문이 생길 때면 그 책임이 이 도시에 있는 것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양 훨훨 떠났다. 그러나 매번 길게는 몇 개월 짧게는 며칠 만에 돌아왔다. 떠날 때의 암담함과는 달리 돌아올 때의 그 수굿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다시 돌아온 눈으로 바라본 한강은 마치 어렸을 때 느끼던 포근한 엄마의 품속 같은 아늑함이었고 물비늘 위로 반짝이는 빛의 파장을 보는 순간이면 내가 있어야할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럴 때면 얼마 전의 암울함은 모두 털어지고 치열한 군상들 속에 섞여 부딪치며 살아가는 게 가장 내게 어울릴 것 같은 마음이 되어 강을 넘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죽음도 그의 죽음도 그것에 더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할아버지의 비통한 죽음의 상처를 세월에 실어 보냈듯 그의 죽음도 세월이 흐르면 별수 없이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리라. 나는 그저 열심히 한강을 건너면 될 것이다. 그것이 할아버지와 그의 죽음에 대한 살아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몸짓이 아닐까?

   이틀의 방황을 끝내고 돌아오며 열차를 탔다. 나는 모처럼 레일 위를 달리는 금속성 열차소리를 듣고 싶었고 역동하는 몸짓을 느끼며 한강을 넘고 싶었다. 늑골을 통해 짜릿하게 전해지는 강의 움직임을,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생성과 소멸, 오고 감의 이치를 새삼스레 느끼며 한강을 넘어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이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