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병점/ 우희정
다시 병점
지난 주말 예정에 없던 천안행 전철을 탔다. 천안의 최선생님은 자신도 서울시민이라고 자처하신다. 그 이유가 전철 한 번만 타면 서울로 입성이니 이게 바로 같은 생활권의 시민이 아니냐는 것이다. 최선생님의 자랑에 다분히 영향을 받아 반나절 나들이 길에 올랐다.
전철이 도심을 벗어나자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이 마치 긴 여행이라도 떠나는 양 기분을 들뜨게 했다. 바로 그때 새로 지은 큰 역사가 눈길을 끌었다. ‘병점역’이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여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틀림없는 병점역이었다. 초라하고 쓸쓸하던 간이역 대신 현대식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건물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점역. 그곳에는 열다섯 살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아버지를 찾아 천릿길을 가던 소녀가 있는 까닭이다.
어느 봄날, 갈 길은 아직도 먼데 생텍쥐페리가 사막에 불시착을 했듯 나는 그곳에 떨궈졌다. 전날 어스름 무렵 나는 마산역을 출발했었다. 삼랑진에서 열차를 바꿔 타고 장장 10시간 만에 도착한 서울. 다시 신탄리행을 타야하는데 남행열차를 잘못 타는 바람에 병점역에 내동댕이쳐지듯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똑같은 실수를 해가며….
못내 걱정스러운 기색인 할아버지와 이모에게 웃어 보이기까지 하며 내 꿈을 좇아 열차를 탔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그날 소소리바람이 어린 가슴 할퀴던 그곳에 앉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꽃샘추위가 귓불을 에던, 특급열차는 애당초 서지 않는 간이역. 온종일 나를 붙잡아 둔 그곳의 핏빛 저녁놀, 그 처연한 빛깔이라니. 하루의 고단한 여정을 접고 양산봉 너머로 지며 나를 더 서럽게 하던 해의 이별의식, 태양도 안식을 위해 숲 속으로 스며드는데 갈 곳 잃은 내 심정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날 이후 아주 오랫동안 저물 무렵 노을빛만 보아도 전신을 엄습하던 오슬오슬한 한기.
내 의식 속에 오롯이 들앉은 그날의 황당함이 아직 생생한데 그곳에 세워진 웅장한 현대식 역사가 예사롭지 않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옛 모습 간데없는 느치미마을도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아파트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교회당이던 역 앞의 빨간 벽돌 건물만이 유일하게 이방인처럼 예전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다만 ‘30년 전통 선짓국’ 간판으로 바꿔 달고서.
내 인생의 첫 출발점이었던 병점의 변모만큼 나 또한 많이 변했다. 간간이, 그러나 내가 느끼기엔 자주 나를 당혹케 하던 장애물들. 그 간이역에서처럼 황망한 상황 앞에 나는 매번 온몸을 떨어야 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우연히도 나쁜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머피의 법칙’이 내 경우인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잃는 것만 있으랴. 장애물에 자주 부딪히다 보니 고통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할 수 있었다. 사람의 한뉘가 기쁨만으로 가득 찰 수는 없지 않은가. 우주자연의 생성근본원리이며, 창조적 우주관을 담고 있다는 태극문양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이 불운이 지난 다음엔 그만한 대가의 행운도 따른다는 이치를, 불운의 부피가 큰 만큼 그 상황을 극복하고 난 뒤의 성취감 또한 크다는 것을 알았다. 도리어 그 모든 것이 섞여 나를 자라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음도….
어려서부터 약간의 총기 때문에 주위분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칭찬에 우쭐하여 내 뜻대로 세상이 굴러가려니 했던 때가 있었다. 어른들이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치켜 주는 바람에 내 생각이 항상 옳거니 여겼고 당연히 모든 결과도 성공적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산처럼 높고 견고해 보이는 외할아버지가 든든한 나의 보루였으니 무서울 게 무에 있었겠는가. 그러니 인생길이 순탄했더라면 한없이 교만해져서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은 불운이란 이름으로 내 앞에 서던 그 상황들이 나를 성숙시킨 탓이리라.
세월의 둘레를 세 바퀴쯤 돌아 다시 병점에 선 지금 과연 나는 어디쯤 와있는가 되돌아보게 된다.
30년 전통의 선짓국집 붉은 휘장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출처: 포토친구, 다음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