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 남자/ 우희정
아래층 남자
우희정
허리도 휘지 않은, 어깨도 기울지 않은, 반듯한 젊은 병사를 연상케 하는 아래층 남자와 인사를 나누는 날이면 나는 참 기분 좋은 하루를 예감한다.
빨간색 체크무늬 셔츠에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맨 아주 핸섬한 모습으로 마주치는 날이면 덩달아 나도 꿈꾸는 소녀가 된다. 그런 날이면 필경 젊은이들과 어울려 산에 간다는 걸 나는 짐작을 한다. 산을 타며 청춘을 구가하는 남자, 산에서 ‘너덜겅’, ‘된비알’ 등 우리말을 줍는 그분이 다름 아닌 함동선 선생님이시다.
이렇게 산에 올라 호연지기를 뽐내는 젊은 선생님이 팔순을 맞으신다니 믿기지 않는다. 아마 평생을 문학 속에 묻혀 사셨으니 늙으실 겨를이 없으셨던 모양이다.
한 번도 머리카락을 흐트린 적이 없는, 아무리 반가운 이를 만나도 최소한의 동작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넥타이 대신 머플러를 얌전히 묶어 가슴 깊이 밀어 넣은 신사. 언제 뵈어도 조심스러운, 곁을 전혀 주지 않는 듯하지만 어쩌다 내 사무실에 들러 한잔의 차를 나눌 때면 나는 또 다른 면모를 엿보게 된다. 겉으론 냉정하지만 속 깊은 정이 꼭꼭 여민 머플러 아래 그 어디쯤에 담겨 있음을 눈치채기 때문이다.
휴전선 너머 갈 수 없는 고향을 가진 선생님이기에 나는 좀 더 가까운 느낌이 드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 아버지의 아픔이기도 하여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스무 살 남짓의 청년이 팔순이 되도록 못내 잊지 못하는 두고 온 그 고향, 가슴 찢어지는 그리움이 쌓여 한恨이 된 어머니. 주검을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아직도 북쪽 하늘 아래 어딘가에 살아 계심을 고집하느라 제사도 못 지내는 아버지의 그 심경을 선생님의 시에서 나는 확인한다.
한 번만이라도 고향에 가야지
밤을 타고 산을 넘는 나날을 보내다가
휠체어에 앉은 채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
병상에서 ‘왜 이제 오느냐’ 하는 어머니
이들은
남과 북을 잇는 고리 구실을 했는데
너무 늦었구나
마른 입을 다시고 물을 마시고
색 바랜 사진을 꺼내놓고
50년 이산 속의 3박 4일은
뜨거운 돌 위에 떨어진 물 한 방울처럼
짧기만 하구나
그래서 부모의 꾸지람을 듣고
형제와 싸우던 옛집이 보고 싶었을 거다
된장찌개에
밥 한끼라도 먹었으면 했을 거다
허지만 이젠 흘릴 눈물도 남지 않았으니
만남의 기쁨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서로 건강을 당부하지만
두 번의 불효가 가슴 미어지게 하는 거
너무나 아픈 만남이었는지 모른다
잠깐일 거다
부적을 허리춤에 넣어주시던 어머니의 손을 놓고
고향을 떠난 지가 50년이 된
나를 보면서
남은 것은 그리움과 기다림뿐이다
-함동선 「남은 것은 그리움과 기다림뿐이다」 전문
그래서 나는 선생님 시의 뿌리가 되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고향을 만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래층 남자라고 버릇없는 말을 했지만 선생님은 내가 태어나던 해에 문단에 나오셨으니 하늘 같은 선배님이시다. 내가 문단 말석에 낄 무렵에는 이미 까마득한 곳에 수장으로 계셨다. 종종 행사장에서 먼빛으로나마 우러러 뵙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었다.
지인이 20년 전쯤에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고 자랑하면서 선생님의 인기가 얼마만큼 대단했는지를 새삼스레 들려줄 때도 부러움만 키웠을 뿐이다. 그런데 언감생심 꿈도 못 꾸어 본 행운이 내게 왔다. 우연히 사무실을 얻어 입주를 하고 보니 아래층에 선생님의 집필실이 있었다. 그날부터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음은 당연지사. 선생님과 한 지붕, 한 건물에 머문다는 것은 굉장한 배경이 아닌가. 그러니 좀 으스댄들 누가 흉을 보랴.
요 몇 년 동안 힘든 고비를 넘기셨다는 선생님, 그래도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여 주시는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철없는 나의 영원한 아래층 남자이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