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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와 변용 -성춘복 시학, 또 하나의 시선/ 박영배

청개구리 2022. 5. 12. 15:54

  해체와 변용  

  - 성춘복 시학, 또 하나의 시선

 

박영배(시인 · 문학평론가, 세명대학교 명예교수)

 

 

1.

 

   참으로 많은 무너져내림, 떨어져내림, 파묻혀버림, 터져버림, 그리고 낡고 삭아 자신이 허물어져버린다는 허망조차 잊고 사는 까막기억들, 그 이유를 바깥으로만 돌리고 있는 큰소리들에 앞서 우리들의 정신구조에다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위 인용문은 성춘복 시인의 11번째 시집인 『헤적이기 〉 해작이기』(1996)의 「책머리에」 일부분이다. 자신이 직접 그린 삽화를 곁들이고 있어 시화집으로 볼 수도 있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낡고 삭아 자신이 허물어져 버린다는 허망조차 잊고 사는 까막기억들’을 되살리면서 자기 자신조차도 속이고 사는 현실의 거짓과 위선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내보인다. 그는 여기서 기존의 글쓰기 방식을 해체하고 시와 회화를 구분하지 않는, 기호와 색채로 표현되는 형태적 변용을 시도하는데, 12번째 시집 『혼자 사는 집』(1998)에까지 수년에 걸쳐 진행된 이 실험적 도전은 그의 시작(詩作) 생애에서 결코 가벼이 보아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60년대의 시대성에 대한 환멸과 갈등, 70년대와 80년대의 좌절과 방황 그리고 정신적 공허와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현대인이 가지는 번민과 고뇌를 10권의 시집에 정제된 언어로 진솔하게 담아낸 시인은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내적 성찰과 함께 자기구원을 위한 또 하나의 ‘나’를 찾아 파격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이순(耳順)을 넘기며 시도된 이 색다른 글쓰기가 그가 염원하는 곳으로 들어가는 결정적 장치였는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 문을 여는 시적 변화의 강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무심히 지나치고 있는, 그때 그 열정의 자취가 어떤 모습으로 꿈틀대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이채롭게 채색된 성춘복의 다양한 시세계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2.

                                                                 - 「토마토 구이」 전문(『헤적이기 〉 해작이기』 1996, 38쪽)

 

   한 덩이 채소로 태어난 토마토가 은박지에 쌓인 채 불에 달구어져 남의 먹이가 되어간다. 화자는 이 상황을 ‘부활’을 위한 의식으로 생각한다. 토마토는 “은박지의/ 아주넉넉한품에/ 안겨달디단꿈을” 꾸지만, 사실상 그것은 “애초의태어날때보다는더측/ 은한넋으로돌아가서/ 남의먹이나되어/ 야하는,” 죽음의 시간이다. 화자는 그러나 “그래// 서/ 겨/ 우/ 살/ 아/ 나/ 야/ 부/ 활/ 이/ 된/ 다”고 믿는다.

   성춘복의 시에 자주 소환되는 죽음은 오랫동안 단단하게 굳어 온 것들을 ‘해체’하여 측은하지만 맑은 넋으로 회귀하는 상태와 연계된다. 그에게 관습적인 것, 규격화되고 조직화된 세계, 어느 사이 몸에 배어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추악함과 무질서 등은 모두 털어내어 묻어버려야 하는 존재들이다. 시인은 글자와 시행의 위치를 조직적으로 배치하여 가오리연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으로 펼쳐놓음으로써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통일체로 의식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묘사는 일찍이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커밍스(E. E. cummings)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소위 구상시(concrete poetry) 또는 형태시(figure poem)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작품에는 종래의 방법으로는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이 적지 않다. 시 전체가 단 하나의 단어 또는 구로 되어있으면서 단어의 조각, 의미 없는 음절, 숫자 또는 구두점들로 구성되어 있거나, 모형을 이룬 패턴들 속에 크기와 색채가 다른 다양한 활자들을 혼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적 형태는 ‘자족적 언어에 갇혀 폐쇄적 완결성에 안주하는 서정시의 미학주의’와는 다르게 극도로 억제된 수사와 언술, 추상적 · 회화적 표현방식으로 완결된 구조의 전체성을 어그러뜨림으로써 사물과 주체의 시선을 외부를 향해 개방시킨다.

                                                      - 「우리 동네 재건축」 전문(『헤적이기 〉 해작이기』 1996, 65쪽)

 

    시인은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동네의 어수선한 풍경을 마주하면서, “낡고 삭”은 “동네의 뒤켠 어느 쪽에”에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묻혀 살고 있”는 어느 가난뱅이를 떠올려 소환한다. 그러면서 대책도 없이 “전봇대 기울기나 재보”고 “썩은 창을 여닫는 재미”로 소일하다가 “그만······/ 땅에 묻히고 마는” 그의 심경을 글자의 색채를 붉게 하거나 시행의 순서와 위치를 의도적으로 바꾸고 무질서하게 배치하면서 시각적으로 증폭시킨다.

   재건축을 앞둔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동네에 기거하고 있는 가난한 화자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까치마저 둥지를 떠났고, 낡은 집들과 기울어진 전봇대가 늘어선 동네에는 적막이 감돈다. 그동안 동네를 차지해온 건물과 사람들은 자리를 내어줄 준비를 끝냈다. 그 자리는 낯선 건물과 사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리를 떠나도, 다시 자리를 차지해도 자리는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동네의 재건축 현장에서 시인은 잠시 회한에 잠겼을지 모른다. 가령,

   ‘이 동네 주인은 누구인가? 까치집도, 전봇대도, 구석진 방 한 칸 도, 그 사글세나 전세도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이곳을 지켜야 하는 저 자리들 외에는 모두 나그네일 뿐. 허물어져 사라지는 존재일 뿐. 아! 헐어 어수선한, 문학이라는 동네에 얹혀사는 ······

 

3.

 

   현대의 시인들은 규격화되고 조직화된 세계에 도전하게 되고, 세계의 감추어진 추악함과 무질서,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모순을 폭로하려 할 때 탈승화의 장치가 필요하게 된다. 성춘복은 시형식의 변이를 통해 의식의 전환과 함께 유연한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탱해온 것들을 모두 내던지는 길밖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죽음만이 그가 꿈꾸는 새로운 세계로의 환생을 가져다준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설면해 보이는 시인의 작품들 그 안쪽을 좀 더 더듬어보자.

                                                               - 「낙법(落法)」 전문(『헤적이기 〉 해작이기』 1996, 81쪽)

 

   꽃이 지려고 한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연약하기 짝이 없다. 떨어지는 법을 알아야 부서지지 않는다. “만지기만 해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큰 숨만 들이쉬어도” “부스러지고 마는”, “그냥 있어”도 “그냥 두어”도 “무너져내리”고 “흩어져내리”며 “산 산 조 각”이 “ㄷㅗㅣㄱ ㅗㅁㅏㄴㅡㄴ” 꽃. 아름다움을 온전히 남겨둘 수는 없는가. 아름다움을 지켜줄 방도는 없는가. 떨어트려도 부스러지지 않는 길은 없는가. 꽃 지면 그 자리에 또 꽃피워 올려야 하는, 마음 급해진 화자는 애가 탄다.

   시인은 최근 한 문예지에 기고한 글에서 하나의 퍼즐로 연출된 커밍스의 시 「l(a」를 예로 들며, 이러한 회화적 형태의 시는 천둥의 시각적(빛, 번쩍임)인 것이 번개의 청각적(소리)인 것으로 바뀌어 엄청난 표상으로 나타남으로써 실로 큰 놀라움을 준다면서, 난해한 추상화도 선 대신에 몇 단어로 형상화하면 이해하기가 쉬워지듯이 한결같이 간단한 선과 언어의 조직으로 철저하게 단순화하기 때문에 어려운듯하나 이해의 끈만 잡으면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고 말한다.

 

                                                                        - 「아카시아」 전문(『헤적이기 〉 해작이기』 1996, 85쪽)

 

   “ 풀/ 풀/ */ 풀/ 풀// 하얗고 노란” “꽃잎들”은 “고스란히 쏟아져 내리”고, “파랗고 빨간” “꽃잎들”은 “흩날려 떨어”져 “신기루의 땅을/ 헛길 만들어 달리”며 “자꾸 손짓해” 보지만 “찾게 되는” 건 모두 “헛/ 것”일 뿐이다.

  시인은 글자와 시행을 시각적으로 독특하게 배열하면서 헛된 신기루를 향해 질주하는 군상들의 욕망과 그 허무의 관계를 상징화한다. 3연에서 신기루의 땅을 가리키는 지시관형사 ‘저’는 붉게 채색된 사각 속에 들어 있다. 화자가 찾아 떠난 욕망이다. 그러나 끝내 찾게 되는 것은 모두 헛것이기 때문에 그 욕망은 부숴버려야 할 것일 수밖에 없다. 5연의 헛것들 사이에 던져 놓은 빈 사각 하나. 화자는 여기를 채워줄 어떤 ‘꿈’이 그리운 것이다. 아래의 시에 거듭 주목해 보자.

                                                                         - 「꿈」 전문(『혼자 사는 집』 1998, 72쪽)

 

   시인들이 내적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Calligrammes)」과 같이, 성춘복은 이것을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놀라운 시적 배열과 표현양식으로 보여준다.

   ‘잠’과 ‘꿈 조각들’이 한데 엉켜 화자를 “마구흔들어놓”고 있다. 꿈은 온전한 형태를 보여주지 않고 잘게 부서진 날카로운 조각으로 굴러다니며 화자를 괴롭힌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부서진의자나” “이쑤시개몇개”가 “취해비틀거리는몸뚱이의깜깜속으로들어와나를마구흔들어놓는”다고 하면서 띄어쓰기 없이 글자들을 붙여 늘여놓음으로써 그 고통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쩌자는 것인가?

   시인에게 꿈은 현실의 삶에서 부인되고 있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의 세계일 뿐이다. 따라서 실현될 수 없는 꿈이 조각으로 흩어져 떠도는 현실의 삶의 공간은 곧 죽음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인은 포기할 수가 없다. 그는 삶을 죽음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현실의 삶은 죽음과 꿈의 세계로 동일시된다. 그리고 마침내 반전(反轉)이 이루어진다. 삶 속의 꿈, 즉 환상의 세계가 죽음이라고 하는 삶의 끝에서 가닿을 수 있는 엄연한 실체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 정신적 해탈로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된 시인은 눈앞에 현현하는 구속 없는 편안의 세계로 손을 내밀고, 노래를 부른다.

 

                                                                 아무 때나 들춰봐도

                                                                 내 골방의 뒤켠 어디서나

                                                                 당신은 늘 밝았고

 

                                                                 휑한 들판의 내 가슴 속을

                                                                 어디고 가득 채우는

                                                                 당신은 언제나 향그럼이었다

 

                                                                 망초꽃이나 쑥부쟁이꽃 같은

                                                                 하지만 머리카락 하나 흩지 않는

                                                                 당신은 엄전스런 아름다움이었고

 

                                                                 한결같은 부끄럼으로

                                                                 내 마음의 산야를 비치는

                                                                 당신은 내 사랑이었거니.

 

                                                                         - 「생각해 보면」 전문(『혼자 사는 집』 1998, 59쪽)

 

4.

 

   성춘복 시인은 이때껏 자신을 지탱해온 시적 지향과 시 쓰기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전문성을 갖는 한 분야의 창조적 사고는 그 방법을 익히고 넓혀간다는 뜻에서, 다른 분야와의 교류는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자신의 삶의 깊이마저 덧보태져야 한다. 60년의 나의 시 작업은 추상화가 곧 단순화라는 다소의 특성을 갖고 다의적인 통찰을 통하여 진정한 삶의 동의어에까지 도달하고자 노력했다.

 

   성춘복의 시정신의 기저에는 늘 시공간을 초월하는 상징과 이미지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들은 때로 단순한 은유적 차원이 아닌 알레고리적인 차원으로 소환되고, 해체와 변용의 몸짓으로 감각적 질서를 왜곡하거나 전도시키며 새로운 경지의 시세계로 비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첫 시집을 상재하고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사랑이나 한을 청승이란 가락에 얹어보려 했던 범주에서 벗어나 색다른 시 쓰기를 결행한다. 그 실험성 짙은 시도는 단순히 관습이나 전통에서 비켜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상투적 서정을 거부하고 마구 ‘헤적이고 해작이면서’ 자신의 내면을 깡그리 풀어헤쳐 새롭게 하려는 끈질긴 집념의 산물로서, 현실의 구속적인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려 ‘혼자 사는 집’에서 외롭게 진행된 제 몸을 사르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문학적이라는 것은 감정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시도되는 모든 문학적 행위들은 그 자체로서 개인 감정의 문학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작가 자신의 정신구조와 문학세계까지 바꾸려는 의도에서 치열하게 지펴 올린 실험정신과 그 파격의 행보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경이로운 눈으로 겸허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은 최근에 상재한 21번째 시집인 『여든의 하루를 사는 법』(2019)의 「시인의 말」에서 “길에 속았고, 모든 역에서 이방인이었고, 늘 허기져있었으며, 자유롭고 싶었고···, 삼십 대 후반부터 하얗게 바래어버린 내 머리칼에 대한 갈망은 오로지 하늘로만 뻗어가는 일”이라고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허기져 올려다보는 이방인의 하늘은 어떤 모습일까. ‘자신의 의지로는 벗어날 수 없는 외진 골방에서 뻐꾹새로 서럽게 울며 어둠을 견디던’ 시인은 그 하늘을 향한 날갯짓을 여전히 멈추지 않은 듯하다.

 

                                 (자료출처: 문학시대2022년 봄호, 통권 139호, 124~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