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방/박영배 시인
오리엔트 손목시계/ 박영배
청개구리
2022. 11. 19. 13:46
오리엔트 손목시계
굴다리 위 이층짜리 낡은 전당포는
손목시계가 제 주인을 대신하여
들락거려야 하는 고단한 노역장이었다
대학 입학선물로 새 주인을 맞이한
은빛나는 오리엔트 손목시계는
밀려 있는 외상값 이천 원 때문에
마른 손목 위에서 늘 불안해했다
비좁은 자취방에서 하루를 굴리며
이 풍진세상을 함께 한탄하다가
오징어튀김 한 접시와 소주 두어 병이
외상장부에 또 이름을 올리던 날
손목시계는
끝내 주인 곁을 떠났다
오리엔트 손목시계는 전당포에서
오지 않는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굴다리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불어나는 외상값을 견뎌내는 일이
더 이상은 어려워진 어느 날
다급해진 마음으로 찾아간
굴다리 밑에는 여러 갈래의 화차길이
멀리까지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플랫폼에는 늙은 역장이 퀭한 눈으로
막 들어온 빈 화차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전당포에서 사라진 손목시계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없는 듯 했다
낯익은 청춘 하나
허둥허둥 서두르며 떠나더라고
표정 없이 알려줄 뿐이었다.
-시집 「술이나 한잔」 2017,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