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 시인 별세
국문학자 오탁번 시인 별세

1970년대 금기시된 정지용의 시로 석사 논문을 써 주목받은 지천(芝川) 오탁번 시인이 별세했다. 80세.
15일 한국시인협회는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국문학자인 오 시인이 지난 14일 밤 9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고인은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문학과와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고인은 석사 논문으로 정지용 시를 최초로 연구해 주목을 받았다. 또한, 대학 재학 중이던 1966년 동화 ‘철이와 아버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집필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어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되며 ‘신춘문예 3관왕’으로도 화제가 됐다.
이후 육군 중위로 입대한 그는 1974년까지 육군사관학교 국어과 교관을 지냈으며 1974~1978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국어과 조교수를 거쳐 1978년부터 모교인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고인은 시인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시뿐만 아니라 소설, 평론을 오가며 다량의 문학 작품을 발표했다. 1980년대 말까지는 소설에 주력하며 다수의 중·단편을 썼다.
시집으로는 ‘아침의 예언’과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 장갑’,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처형의 땅’과 ‘새와 십자가’, ‘저녁연기’, ‘혼례’,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 ‘순은의 아침’ 등이 있다. 또, 평론집 ‘현대문학산고’를 비롯해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 ‘현대시의 이해’, ‘시인과 개똥참외’, ‘오탁번 시화’, ‘헛똑똑이의 시읽기’, ‘작가수업-병아리시인’, ‘두루마리’ 등 다양한 산문집도 냈다.
고인은 1998년 시 전문 계간 ‘시안’을 창간했다. 2008∼2010년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고, 2020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다.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김삿갓 문학상(2010),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상 시부문 대상(2011)을 받았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은 "화려하게 등단한 오탁번 시인은 이후 이어진 작품에서 인생과 함께 시가 익어간 대표적인 시인"이라며 "한 생에 있어서 시와 함께 살아간, 시로 자신을 형상화한, 시로 생애를 완성시킨 대표적인 시인이다. 남기신 작품은 우리 문학계의 큰 보물"이라고 애도했다.
빈소는 고려대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 특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17일 오전 10시, 장지는 제천 개나리 추모공원이다.
[출처] 문화일보, 박동미 기자, 2023, 02,15.
<추가>
제천 백운리의 <원서문학관>은 시인이 고려대를 정년퇴직한 뒤인 2003년 부인 김은자 교수와 함께 자신의 모교였던 백운초등학교의 폐교된 애련분교를 매입해 세운 문학관이다.시집 <아침의 예언>(1973),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1985), <생각나지 않는 꿈>(1991), <겨울강>(1994), <1미터의 사랑>(1999), <벙어리 장갑>(2002), <손님>(2006), <비백>(2022), 소설집 <처형의 땅>(1974), <새와 십자가>(1978), <저녁연기>(1985), <혼례>(1987),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1988), <순은의 아침>(나남, 1992), 평론집 <현대문학산고>(1976) 등을 남겼다.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대상 시 부문(2011) 등을 받았다.
눈 내리는 마을
오 탁 번
건넛마을 다듬이 소리가
눈발 사이로 다듬다듬 들려오면
보리밭의 보리는
봄을 꿈꾸고
시렁 위의 씨옥수수도
새앙쥐 같은 아이들도
잠이 든다
꿈나라의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밤마실 나온 호랑이가
다디단 곶감이 겁이 나서
어흥어흥 헛기침을 하면
눈사람의 한쪽 수염이
툭 떨어져서 숯이 된다
밤새 내린 눈에
고샅길이 막히면
은하수 물빛 어린 까치들이
아침 소식을 전해 주고
다음 빙하기가 만년이나 남은
눈 내리는 마을의 하양 지붕이
먼 은하수까지 비친다
- 오탁번 「눈 내리는 마을」, 시인생각, 2013.
芝川
1943년 7월 3일 충청북도 제천군, 현재의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서 아버지 오재위(吳在謂)의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82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수도여자사범대학 국어과 조교수를 거쳐 1978년부터 2008년까지 30년간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6년《동아일보》동화부문, 1967년 《중앙일보》 시부문, 1969년 《대한일보》 소설부문 신춘문예로 3관왕을 차지하며 등단했다.
등단 이후 그는 지난 40여년간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것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m의 사랑』, 『벙어리장갑』 등의 시집을 상재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과 평론 및 문학 연구 등의 분야에서도 활약하여 여러 권의 작품집과 평론집 및 이론서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1998년 시 전문 계간 『시안』을 창간했다.
초기시에서 최근 작품까지 세련된 이미지스트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아 온 그의 시는 민족 고유어와 겨레의 원형적 정신 세계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보여주기도 함으로써 한국현대 시사에서 실험과 전통의 변증법적 가능성을 입증하여 주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농익은 서정성은 전통을 수용한 결과로만 간주할 수 없는 현대적 품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의 시는 예리하게 빛나는 이미지 구사를 시작 방법의 중심 축으로 삼으면서도 모국어의 의미와 율격과 그에 걸맞는 토속적인 세계를 존중하였다. 그 동안 토속성 짙은 시어와 소재를 찾아 갈고 닦으면서도 현대시의 근간인 이미지와 상징의 깊이를 그 안에 내장해 갔던 끈질긴 장인 정신은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러한 그를 전통 지향적인 시인이라거나 또는 모던한 이미지스트 시인이라거나 하는 식의 분류법으로 다룰 수는 없는 일이다. 오탁번은 전통의 터전 위에 영미문학의 경향을 수용한 한국적인 모더니스트다.
이와같은 오탁번 선생의 문학의 의의는 1930년대에 활약했던 정지용의 시사적 의의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오탁번의 석사 및 박사 학위논문이 모두 정지용을 대상으로 한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로만 넘길 수는 없을 줄 안다. 오탁번과 정지용의 상호 관련성은 앞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해 볼 만한 문제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그의 균형 감각은 이 세계의 질서를 바라보는 순결하고 원형적인 시각에 힘입어 더욱 정교한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순수 의식의 근간이다. 그의 시의 혈맥을 이어주는 동심적 상상력 역시 이러한 순수 지향성과 이어질 것이다.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김삿갓 문학상(2010),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대상 시부문(2011)을 수상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