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방

귀여리에서/ 우희정

청개구리 2021. 5. 4. 20:17

  귀여리에서

 

 

   천둥을 동반한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 이렇게 달구비가 쏟아지는 밤이면 산과 강, 나무와 새들은 어떤 모양으로 잠을 청할까. 못내 안달이 났다.

   뿌연 안개를 헤치고 그들을 만나러 새벽길을 나선다.

   제일 앞에 납작 엎드린 산, 그 뒤로 살포시 웅크린 산, 그 너머 무릎 세워 몸 일으킨 산, 산. 그들이 선잠 깰까봐 발자국소리까지 죽이며 다가간다.

   간밤의 거센 빗발에도 산은 꿈쩍 않고 있는데 강물은 아픔을 속으로 내처 삼키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속을 뒤집었는지, 시뻘건 황토를 내뱉으며 몸을 뒤틀고 있다. 온몸으로 감싸 안았던 모든 것을 토악질하듯 내뱉으며 뒤척이고 있다. 한없이 넓고 깊게 보듬는 것에 만족하던 강도 가끔은 강한 거부의 몸짓으로 오롯이 자신을 뒤집어놓을 수 있는 날이 필요한지 모른다.

   사람살이에 지칠 때면 나는 이 길로 나선다. 너무 가라앉아서 정적감에 휩싸일 때도 좀은 마음을 출렁이고 싶어서 이 길을 달린다.

   그저께 동살에도 나는 푸른빛으로 깨어나는 이곳에 왔었다. 그날의 강은 모성으로 풍경을 끌어안고 있었다. 밤새 강물에 몸 담그고 자다 눈곱을 떼고 꿈에서 깨는 산을 보여 주었다. 자욱하던 물안개가 나보다 먼저 산이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느새 산등성이로 올라가고 있었다. 물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냥 두고 기지개를 켜는 산의 기척에 수초들 사이에서 청둥오리 한둘이 깨어나고 있었다. 부지런한 암컷은 먹이를 찾느라 물살을 가르고 곱게 머리 빗어 단장한 수컷은 뒷짐을 진 채 유유히 멱을 감고 있었다.

   게으른 오리 한 마리 무리에서 벗어나 덜 깬 몸짓으로 강물에 잠긴, 아직 산이 개키지 못한 잠자리를 망가트리고 있기도 했다. 한 쪽에서는 무슨 못된 꿈을 꾸었는지 두어 뼘 남짓한 금빛 물고기 지느러미 번쩍이며 수면 위로 솟구쳤다. 그 몸짓에 수초 속에 있던 피라미들 놀라 작은 소란이 일었다. 갈밭에서 긴 목을 빼고 그 소란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는 왜가리…. 그 모든 것을 품어 안고 있던 그날의 강은 황톳물을 토하는 오늘과는 영 딴판으로 넉넉하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누군들 평온한 날만 있을 것인가. 참다못해 더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때 저 강처럼 속내를 한 번쯤 뒤집어 스스로를 정화시킬 수 있다면 그도 좋을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추슬러야 할 때면 늘 귀여리 강가에 선다.

 

출처: 포토친구(다음갤러리)

'수필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래층 남자/ 우희정  (0) 2021.07.07
고등어(낭송)/ 우희정  (0) 2021.05.21
다시 병점/ 우희정  (0) 2021.04.29
돌아오지 않는 강/ 우희정  (0) 2021.02.16
그 산의 바다/ 우희정  (0) 2021.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