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어는 어디에 있는가
- 우희정
둥둥둥 법고가 울었다. 담홍빛 노을 속에 잠시 잠겼다가 되살 아난 북소리가 곡선의 탑사를 한 바퀴 돌아 수마이산 잔등을 타 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날 내가 은수사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저녁 예불시간이라 두 스님이 법고를 치고 있었다. 세상사를 잊어버리고 무아경에 빠져 든 두 스님. 북소리와 스님들의 동작은 일치감을 이뤄 숨 막히는 긴장감이 돌았다. 마주 보고 선 스님의 손이 차례로 허공을 가르 며 선을 그리고 내려와 힘차게 북을 두드렸다. 다다다다닥, 호흡 이 조금만 고르지 못해도 어긋날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 두두 둥둥둥, 법고는 가죽 가진 모든 짐승을 위로하기 위해 온 몸으로 서럽디서럽게 운다고 했다.
나는 음양오행의 순환을 나타낸 정명암에서 유래했다는 태극전 을 살짝 엿보고 아직도 북소리의 여운이 남은 듯한 탑사를 한 바퀴 돌았다. 이갑용 처사가 쌓았다는 탑의 선이 참으로 고왔다. 천지탑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80여 기의 탑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가녀려지다 작은 돌 하나로 마침표를 찍은 탑이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1백여 년을 버텨왔다니 이게 어디 사람의 힘만이겠는가? 꼭대기에 기도 한 자락 올려놓으면 절로 하늘에 닿을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조금 전에 법고가 아닌 목어를 치는 스 님의 모습을 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지금 나는 착각이라는 말을 썼 지만 사실 내 의식의 어디쯤에서 솟구친 기억의 한 자락은 분명히 목어를 치는 스님을 보았던 것이다. 두 팔을 벌려도 맞닿지 않는 커 다란 목어…. 머리가 조금 아픈 것 외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를 비집고 들어온 혼란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목어(木魚). 옛날 어떤 스님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살다 죽은 뒤에 물 고기가 되었는데 그 등에서 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어느 날 스승 이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갈 때 나타나 죄를 참회하므로, 수륙재 를 베풀어 물고기 몸을 벗게 하고 그 나무로써 물고기 모양을 만 들어 달아놓아 수도하는 스님들을 경책하는 도구로 썼다는 목어. 일설에는 물고기는 밤낮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늘 깨어서 꾸준히 수도 정진하라는 뜻으로 고기 모양을 만들었다고 도 한다. 그런데 그 목어가, 그것도 한 아름이 넘는 큰 목어가 뜬금없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그날 이후 내게 목어는 하나의 화두였다.
그렇게 은수사를 다녀온 지 꼭 1년이 지난 며칠 전, 문학기행 일정에 마이산이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 그곳에 커다란 목어가 있는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서울을 떠날 때의 조급하던 마음과는 달리 나는 입구에 서 걸음을 멈추었다. 목어의 실체를 확인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참을 갈등하다 끝내 산을 오르지 않았다. 만약, 그 실체를 확인 하지 못하면 무너져 내리는 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할까봐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산사를 향해 발길을 내딛는 일행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말의 귀를 닮아 마이산(馬耳山)이 되었다는 돌올히 솟은 산을 올려다보았을 뿐이다. 단풍 든 산은 지금이라도 당장 넓은 광야로 달려나갈 듯한 자세의 알맞게 살찐 적토마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올라갔던 일행들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 다시 마음이 조급해져 누구에게랄 것도 없 이 가까이 온 사람에게 불쑥 말을 건넸다. “저 혹시 은수사에 커다란 목어가 없던가요?” “못 봤는데….” 목어는커녕 법고도 못 봤다는 그의 대답과 나의 어리석음에 나 는 앙천대소 할 뻔했다. 어찌 눈에 보이는 것만을 진실이라 할 것인가. 그곳에 목어가 있건 없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말이다. 이미 내 마음 속에 자리 한 목어가 있지 않은가. 그것이 어떻게 하여 내 마음자리로 들어 왔는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내가 작은 깨달음 하나 건질 수 있다 면 그로써 족하지 않은가.
돌이켜 보니 목어는 그동안 나태해진 내게 항상 깨어있으라는 경고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제야 지난 1년이 뒤돌아봐졌다. 매너리즘에 빠져 한없이 침잠해가던 내 의식 속에 들어온 무의식의 자각. 그 경고음을 인식 못한 무딘 성정으로 지난 1년 몸과 마음을 무던히 앓았다. 밤새 미열에 시달리며 꿈을 꾸다 눈을 뜨면 온몸이 아팠다. 그런 날이 몇 날, 몇 달이 계속되자 내 몸 어딘가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 같아 스산했다. 그래도 나는 스스로를 추스르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두 손 들고 항복할 자세를 취한 양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냈다.
아프다는 핑계로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하고 보낸 날들…. 그날들은 내게 있어 의식은 있으되 깨어있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은 내 안에 자리한 목어를 횃불 삼아 기지개를 켜야 할 때 인 것 같다. 정신을 깨우는 소리가, 내 자아를 깨우는 소리가 이 제야 들린다. 다다다다닥…. (2000)
(한양수필 제30집,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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