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꿈
기억하고 계시나요. 달마저 구름 사이로 숨어버린 그날 밤 말입니다. #배냇골 을 찾아들던 그날 당신의 옆자리에 앉아 세상을 보았지요. 모든 것들이 잠들고 오롯이 별들만이 쏟아질 듯한 암흑 속을 당신은 묵묵히 앞만 응시하며 달렸고 그런 당신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나는 가슴 덜컹이는 느낌을 받았지요.
당신은 산길 모롱이의 공동묘지를 지나며 몇십 년의 세월에도 배냇골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에 이야기했지요. 나는 왜 바로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 주검의 어둠에서 한 가닥 희망 닮은 사랑을 꿈꾸었는지 모르겠네요.
어디 세상사가 아이러니한 일 아닌 것이 있을라구요. 여성의 자궁을 닮아 배태고개라 이름 붙은 그곳 또한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의 주검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지 않아요.
6․25때 그곳은 좌익의 은신처로 쓰였다지요. 채 꿈도 꾸어보지 못한 그들, 채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봉오리로 접어야 했던 젊음과 이상(理想)이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안개 되어 골짜기에 스며있는 듯했지요. 공비소탕 작전으로 산천에 피를 뿌리며 사라져간 그들의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요? 스러져가는 그들을 모성의 본능으로 보호해 주지 못한 한(恨)을 가슴에 품고 속울음을 울어야 했을 우리들의 그 산야.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무심코 밖을 내다보다 또 한 번 가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지요. 이렇듯 청량한 곳에, 그렇듯 싱그러운 곳에서 목숨을 꺾어야 했던 그들의 청춘이 못 견디도록 짠한 아픔으로 다가왔지요.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포화 속에서도, 죽고 사는 것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랑에 빠진 남녀가 있었다지요? 애절하게, 상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소리 뜨거워지는 역사를 했겠지요.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안락한 내일도, 가슴 벅찬 행복도 아닌 짧은 의식을 치를 장소였다지요. 하늘은 보여도 좋으니 두 사람의 몸을 가려 줄 수 있는 반듯한 공간만이 간절했다는 그들의 욕구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사랑이란 그렇게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소리없이 스며드는 것일까요.
어제는 #동백꽃 뚝뚝 지는 나무 아래 한참을 서 있었어요. 쏟아져 내리는 선홍의 비를 맞으며….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후회없이 그리움 쏟아내고 절정의 순간에 그 정열 고이 접어 제 몸 던질 줄 아는 용기에 가슴이 먹먹했지요.
그런데 나는 사랑하는 일이 무에 그리 어렵다고 허둥대기만 하는지 참 모르겠네요. 아니지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익숙지 못한 내 사랑의 노릇은 서투름에서 오는 당황함이겠지요.
아니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젊은 두목 오그레처럼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해서가 아닐는지요. 왜 매번 자기감정에 충실하지 못하여 마음대로 틀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자신을 가두려는 것일까요? 동백나무 아래에서조차도 왜 애써 따슨 가슴을 식히느라 숨을 골라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주검을 옆에 둔 절박한 상황에서도 사랑을 한 저들에게는 없던 내일이 내게는 있는데도 말이에요. 맞아요. 내게 내일이 있다는 것, 혼곤한 봄꿈에 한 번쯤 취해 봐도 된다는 뜻. 그렇지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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