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방/성춘복 시인

온수행 전차를 타고/ 성춘복

청개구리 2020. 7. 22. 20:47

온수행 전차를 타고

                                         - 성 춘 복

 

 

 

버릇이었을까                                       

얼마쯤 더 살아낼 수 있겠다며

믿음 같은 감기약 두어 알

끼니로 배 속에 밀어 넣고

남루(襤褸)를 휘날리며 전차에 오른다                            

 

때로는 찬밥 한 술

늦은 요기로 때우고

쉽게 탕진할 시간이 아까워

늘 그렇게 하듯

적당한 자리를 편안으로 깔지만

 

실크로드의 어느 배불뚝이마냥

사하라의 나귀 끄는 촌부(村夫)로

오늘은 온수행 전차를 타고

무임승차의 슬프고 갸륵한

내 팔자의 여로를 개척해 가노라면

 

종착역보다는 몇 정거장 앞서

어떤 간이역이라도 상관치 않을

그곳, 낯이 익은 그 집

지워지지 않을 얼굴이 비치면

내 가슴은 마구 뜀박질이다

 

몇 번 거듭해도 좋을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말

낯이 선 동네의 바로 그 사람에게

내가 타고 온 속도만큼의

꾸러미 마음을 내동댕이친다.

 

                                    -제16시집 「봉선화 꽃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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