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
- 박 영 배
조석으로 찬 기운이 돌고
하릴없이 주위가 허허(虛虛)하여
술 한잔이 간절해지던 날
핸드폰 속 꼭꼭 숨어있는
바람의 친구들 모두 찾아내어
하나둘 골라 찍다가
반잔 술에 인사불성인 저녁놀
몸 안 좋다 핑계 댈 게 뻔하고
맘 여린 산국(山菊)은 무서리 등쌀에
바깥출입 잊은 지 오래라
아, 얼마 전
낯빛 허옇던 낮달이
위장 반턱이나 잘라냈다지
가장(家長)을 가장(假裝)하면서
아직껏 비어낸 가슴 한구석 맹렬히
지키고 있을 왕년의 전사들
무슨 긴한 할 말이 따로 있을 리 없지만
세상 발갛게 물들기에 앞서
술 아님 쓴 커피라도 훌쩍거리면서
얼굴 한 번 봐야 않겠냐며
웬일이여?
졸린 듯 쉰 소리 보내오고
보고 싶다야! 재빨리 내질러 놓으면
혹 모르지, 그 중 누구라도
옛 버릇 버리지 않고 있다가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해야지 할지
그 적막한 말이라도.
- 시집 「술이나 한잔」 2017
'시인방 > 박영배 시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 시린 날/ 박영배 (0) | 2021.01.01 |
---|---|
의림지 (0) | 2020.12.03 |
가을산에 가시거든/ 박영배 (0) | 2020.11.03 |
벤치에 앉아서 (0) | 2020.10.22 |
가을비/ 박영배 (0) | 2020.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