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방/박영배 시인

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 박영배

청개구리 2020. 11. 11. 07:48

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

                                           - 박 영 배

 

조석으로 찬 기운이 돌고

하릴없이 주위가 허허(虛虛)하여

술 한잔이 간절해지던 날

 

핸드폰 속 꼭꼭 숨어있는

바람의 친구들 모두 찾아내어

하나둘 골라 찍다가

 

반잔 술에 인사불성인 저녁놀

몸 안 좋다 핑계 댈 게 뻔하고

맘 여린 산국(山菊)은 무서리 등쌀에

바깥출입 잊은 지 오래라

 

아, 얼마 전

낯빛 허옇던 낮달이

위장 반턱이나 잘라냈다지

 

가장(家長)을 가장(假裝)하면서

아직껏 비어낸 가슴 한구석 맹렬히

지키고 있을 왕년의 전사들

 

무슨 긴한 할 말이 따로 있을 리 없지만

세상 발갛게 물들기에 앞서

술 아님 쓴 커피라도 훌쩍거리면서

얼굴 한 번 봐야 않겠냐며

 

웬일이여?

졸린 듯 쉰 소리 보내오고

보고 싶다야! 재빨리 내질러 놓으면

 

혹 모르지, 그 중 누구라도

옛 버릇 버리지 않고 있다가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해야지 할지

 

그 적막한 말이라도.

 

                                  - 시집 「술이나 한잔」 2017

 

2018년 늦은 가을 고별강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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