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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의 자화상
성춘복(成春福) 시론 박이도 한 권의 시집에서 시인이 무엇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였는가를 읽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감상의 의의를 충분히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成春福의 [네가 없는 이 하루는]은 시집 제목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듯이 죽음에의 두려움과 외경의 뜻이 상징화되어 있다. 또 이것은 허무와 절망의 함축성이 진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외로움에서 소외의 감정으로까지 확대되고 그것은 또 하나의 집중적인 관심이 되는 떠돌이, 즉 집시(Gypsy)의 풍부한 체험의 에스프리이다. 보고 듣는 풍물, 나아가서 문화적 구조에 대한 경이의 발견 등은 집시의 넋을 빼어 버릴 수밖에 없다. 구조주의는 문화 인류학의 차원에서 인간 집단의 각종 제도가, 마치 언어가 문법에 의해 분별되는 것과 같이 특유의 문법을 지닌 언어로서의 구조를 지칭한다. 이 시집 제2부에 속한 시편들이 여기에 속한다. 전반적으로 成春福의 [네가 없는 이 하루는]은 감각이나 격정, 혹은 형식면의 실험 같은 차원이 아니다. 사실성에 충실하면서 유순한 어휘화 구문으로 전개된다. 극적인 파탄에 의한 충격보다는 직관에 의한 차분한 호소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H. 융거가 지적했던 언어의 세 가지 기능 가운데 속하는 환기와 묘사의 기능을 통해 인상적이고 사실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누가 없느냐 누가 없느냐 ......중략...... 네가 달아난 길의 끝에서 성냥개비 마구 그어대며 어둔 내 눈 밝히듯 낯선 문 두드리나니 거기 아무도 없느냐 누구 없느냐. - <빈집을 향하여>에서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눈 내려 막힌 길 구름 속을 헤매다가 낯선 집 흔드나니 목청 돋워 찾아도 문짝은 녹아 붙어 속소리로 울리나니...... - <문 앞에서>에서 앞의 <빈집에서>의 '빈집'과 뒤의 <문 앞에서>의 '낯선 집'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죽음의 실체로 드러나는 영혼이 방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살아서 살던 집을 죽어서 찾아온 영혼이 육신을 부르거나 더불어 나누는 독백이요, 절규인 것이다. 죽음에 관한 명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 다. 죽음에 관한 이모저모를 의식할 때 인간은 삶의 기본이 되는 원형, 즉 영원한 주제 의식을 잡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가까운 주변에서의 한 죽음을 볼 때 그것은 바로 살아 있는 자의 죽음으로 환치되어 떠돌게 된다. 내가 죽으면, 살아서도 외로운 내가 죽으면 나의 현실은 얼마나 더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 될까. 여기까지 상상해 낼 수 있는 것이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시편들이다. '네가 달아난 길의 끝에서'의 '네가'란 영혼 자신의 육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이하의 "성냥개비 마구 그어대며/어둔 내 눈 밝히듯" 찾아온 이승에의 안부와 수심에 찬, 그리고 호기심에 넘치는 간절한 심정이다. 그래서 '거기, 아무도 없느냐/누구 없느냐'고 소리 없는 절규를 하고 있다. 문득, 죽음처럼 느껴지는 스스로의 결여의식이 살아날 수도 있다. <문 앞에서>의 '이리 오너라/이리 오너라'는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눈 내려 막힌 길/구름 속을 헤매다가' 돌아와 낯설게만 보이는 자기 집 앞에 선 영혼의 서글픔이 '속소리로 들리나니'로 절실함을 호소하고 있다. 낯선 집, 빈집으로, 인생의 외로움, 개별성 따위를 상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살아있음의 허무감을 제시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좌절과 두려움 등을 생각하게 한다. 형식상 살아 있는 자와 죽어 영혼으로 돌아온 자, 즉 自我의 二元性을 축으로 진전시킴으로써 감상자의 인식을 돕는다. 인간은 지상에서도 집시의 운명이나 영혼으로 돌아가도 역시 떠돌이의 외로움을 면키 어려운 것일까. 제1부 <<눈감고도 가는 길>>에 수록된 시편들은 대부분이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한아름 흙을 받아 꼭꼭 너를 묻었다 - <下棺>의 첫 연 이렇게 침착한 톤이 마지막 연에 가면 "너를 버리고 오던 날/옷자락엔 안타까움만 묻었지/쩍쩍 갈라지는 논바닥같이"라고 스스로 혼란에 이르는 自壞感에 빠지고 만다. 사실 구문 자체는 계속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자괴감을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죽은 자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산 자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下棺> 속에서 "잘 닦인 창 너머/빤히 바라보이는 너의 집"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너의 집'도 결국은 앞에 인용했던 시편들의 '낯선 집'이나 '빈 집'과 같이 죽음의 영혼으로 돌아와 보는 자기 집에 해당한다. 상징주의자들이 즐겨 다루는 知的인 사색과 명상의 루트로 발견되는 어휘들이다. 떠날 것을 믿었듯 돌아올 것도 내 알거니 돌아와 다시 볼 너의 집, 너의 하늘 - <入棺 이후>에서 이 시에서 成春福이 넘나드는 죽음과 삶의 계곡에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있다. 죽어 떠날지라도 영혼으로 다시 돌아와 들어앉게 될 너는 누구일까, 그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바람이었네, 천둥이었네. 가슴 깊은 모랫벌을 쓸고 가는 가을밤의 폭풍이었네. 고목 사이 손을 뻗으면 새 한 마리 슬퍼도 울지 않는 둥지였네. 빗소리였네, 어둠이었네. 뱃머릴 흔드는 사나운 흐름이었네. 곤히 잠들었던 내 출항지 한 방울의 파문으로도 가라앉으려 하네. 바람은 없었네, 어둠은 없었네. 썰물과 밀물에 들고날 나의 길은 없었네. - <폭풍의 노래> 전문 한 편의 시로서 완벽하다. 소위 형식과 내용, 내용과 주제 의식이 제멋에 맞게 짜여진 것이다. 우선 어휘의 낭비가 없이 절제된 점, 어휘 선택의 적절성이 이 시를 읽는 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바람이었네, 천둥이었네"라는 경험 의지의 긍정적 情調가 적절한 패러다임으로 짜여 있다. 이런 형식상의 흐름은 마지막 연에서만 "바람은 없었네, 어둠은 없었네"라는 부정문으로 노래한다. 이것은 일종의 반어적 표현이요, 아이러니컬한 심리적 의도에 해당한다. 그것은 사의 구문이 모두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이 과거의 경험 세계를 되살리고 정의를 내림으로써 생애적인 허무감을 자각하고 각성하는 여운을 남기게 한다. 이 시는 主情的 흐름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호소력보다는 知的 뉘앙스를 많이 품고 있다. 즉, 제1연에서 제4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바로 한 생애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 이 모든 과정을 부정하는 구문으로 "썰물과 밀물이 들고날/나의 길은 없었네"라는 방향 전환은 지금까지의 인생 도정에 대한 定義요, 규정에 해당한다. 그 정의가 '......없었네'로 그쳐 과거의 경험 세계를 부정하는 것 같으나 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성질이기에 과거에의 自省으로 허무감을 강렬하게 도출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과거 지향적이다. 과거 지향으로 오늘의 위치를 확인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의 감동을 발산한다. 그런 차원에서 주제 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깨우침이게 하소서 얼른 잠에서 벗어나 언제나 외톨박이인 나를 혼자 아닌 둘이나 셋이게 하소서 - <기원>에서 종요로움이 뼈를 깎는구나 차라리 절간이라도 되었으면 - <自嘲의 노래.1>에서 삭인 길 되짚어도 이 저림, 이 시림 혼자 갈 수 있을지 아득하고 까마득하다 - <自嘲의 노래.2>에서 여기 인용한 시편들은 <폭풍의 노래>에서 보여준 허무감에 대한 구체적인 편린들이다. 한 생애를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지나간 것들에 대한 회상에 빠지게 된다. 그것을 추억의 차원에서 그리움으로 살려 낸다. 이것은 다시 외로움의 情調로서 구성된다. 인간의 허무 의지란 가장 손쉽게 전달되는 감상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속성에 힘입어 인용한 시편들을 비롯 <그댄 알리니>, <塔門> 등 일련의 시들이 외로움과 허무 의지의 절실함을 호소하고 있다. ①聖니콜라이 호텔의 구석방 층계를 딛고 이 다락방을 벗어나 난 어엿한 그곳 사람으로 전차를 기다린다. ②1987년 5월 25일 오전 10시를 조금 지나 맑고 깨끗한 초여름의 하늘을 가슴엔지 머리엔지 아, 작은 구멍으로밖엔 볼 수 없는 <반 고호 미술관을 찾아가는 법>의 시에서 두 군데를 인용했다. 사실적인 서술이다. 여행자가 빠지기 쉬운 자기 도취가 없고 흥분도 없다. 사실적인 구문이 오히려 간결성의 선명한 인상을 준다. 제2부 <<남의 집 문간에서>>에 묶인 시편들은 기행시이다. 서사시가 필요로 하는 인물.聖地.사건 따위들을 단편적으로 활용, 서정적 기조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이때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은 하나의 상징물로서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대상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동시에 언어의 기호화로써 상징적인 세계로 구성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기행시에서 볼 수 있는 이질감, 정서적 저항감 내지 反예술성의 사물들까지도 자연스럽게 시적 상징성을 획득하게 된다. ①과 ②의 부분에서 우리는 한 시대를 되돌아가 고전적 회고조의 공간을 확보한다. 그것이 사실적이어서 섬세한 시적 상상력을 유발하는 데 기여한다. 유채꽃이 구름으로 뜨고 지천으로 민들레가 길을 숨긴 안개 속의 성채 포른버그의 바닷가를 나는 헤맸다. - <햄릿의 城>에서 기행시에서 얻을 수 있는 이국 풍정이 서정적으로 승화된 시이다. 아름다운 풍경화, 그 정취에 흠뻑 빠져 버릴 수밖에 없는 서정성이 살아난다. 기대하고 꿈꾸었던 세계에 대한 신비감으로의 용해이다. 그것은 호기심에 찬 묘사로써 시의 멋을 살려내고 있다. 두오모나 그런저런 이름의 예배당이 즐비하지 않아도 우리의 告解는 이루어졌다. 올리브며 유도화 나뭇가지 수다스런 꽃잎 헤아리며 깡마른 모래땅에 발목 묻으면 罪도 한결 가벼워져 갔다. - <코르푸에서의 일주일>에서 정신적인 긴장감의 해소법이다. 궁극적으로 자기 해방감, 자유로운 정신의 여행, 즉 집시의 애환을 노래하고 있다.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애당초 그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성과의 차이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무엇을 얻기 위한 여행이었을까. 예술적 모험으로서의 여행, 그 집시의 애환을 담고 떠도는 시정신의 긴장이 스스로 풀어지며 자기 탐닉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고해는 이루어졌다."든지 "罪도 한결 가벼워져 갔다"는 인식은 마치 종교인의 聖地 순례에서 느낄 수 있는 가치성을 획득한다. 종교적 의식으로 사물을 관찰할 때 모든 것이 聖所의 상징물로 보일 수 있듯이, 成春福은 기행지의 역사적 고적에 대해 정서적이며 문학적인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 <葉書 고르기>에서는 문득 外地에 나가서 온통 그곳에 빠져 있던 정신이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①조선 등잔과도 같은 벽에 걸어 환할 것을, ②고르면서 생각하는 일은 잃어버린 우리들의 고향과 땅 속 깊이 묻힐 돌아갈 곳의 우표값 도둑 맞아 없어진 내 정신의 딱한 형편도 아우른다. - <葉書 고르기>에서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를 생각하는, 가장 소박한 자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는 순간, 떠나온 距離와 시간을 생각한다. 그것은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 자신의 모든 연고가 있는 곳을 생각하게 됨은 바로 그리움에 해당한다. 집시의 방랑벽에서 문득문득 부닥 치는 정신의 원형에 해당하는 감정이다. 멀리 외지에 나와서 고향을 생각하는 의의를 엽서 고르기로 드러낸 것이다. 인간 정신은 어디에 있든 미지의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혹은 되돌아가고 싶은 나라,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지닌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정신 활동을 집시의 자화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방파제>는 감각적이며 저돌적인 시이다. <폭풍의 노래>가 서정시가 갖춰야 할 요소를 두루 갖춘 것이라면 이 시는 상징성을 고도로 유발시키고 있다. 잠자러 들어가던 물새의 꽁지가 어둠 속에 떨어졌다. 한가닥 바람이 너풀거리고 칼날 같은 불길이 내 가슴을 도려냈다. - <방파제> 제1연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시적으로 압축한 예이다. 무작위로 밀려와 덮치는 파도를 두고 더욱 냉정을 표시한다. '물새의 꽁지가 어둠 속에 떨어지'는 무대책의 순간, 그 정신적 당혹감과 겁에 떨리는 현실 앞의 성난 사태, 파도를 두고 "칼날 같은 불길이/가슴을 도려냈다."고 표현함으로써 그 사태의 처절함을 상징으로 보여 준다. 읽는 이로 하여금 성난 파도, 어둠에 잠기는 방파제의 조급하고 두려운 감정을 극적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이 시는 매 연에서 "바닷새의 파람 소리에 휘감겨/마구 손짓했다.", "턱에 닿는 숨소리/나는 살아있음을 기쁘게 고백했다./오, 내 무덤인 파도여" 등과 같이 강인한 정신으로 맞서는 양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길을 주소서 뜻이 있는 곳엔 반드시 길이 나서듯 우리에게도 그 길이 있게 하소서. - <길이 있는 곳에> 제1연 조국의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기원의 시이다. 이 시는 신앙의 차원으로 읽어도 좋고 통일 의지의 진정한 호소로 읽어도 좋다. 시의 기교를 떠나 진실의 고백, 그 자체로서 한 편의 감동적인 시가 된 것이다. 끝으로 成春福의 <자화상>을 인용한다. 그는 이제 먼 외지에 나가 집시의 애환을 몸소 체득하고, 자신의 참고향이 어디인지, 스스로 해답을 얻고 있는 듯하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래서 더욱 알 수 없는 그림자의 그림자 어둠 속에선 흔적을 버리고 맑음 안쪽에선 뚜렷하게 서는 검정 빛깔만의 눈 검정 빛깔만의 머리 투명한 머리칼의 그림자 - <자화상>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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