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遠西문학관 가는 길/ 최길하 원서遠西문학관 가는 길 최길하 아버지 등에 업혀등잔처럼 졸던 길 나즈막한 등마루 길 흰구름 앞세운 길 풀벌레 갈피갈피 숨어 얇은 시집 같은 길. 그 길섶 소슬한 바람"훅"끼치는 가을 향기 까무륵 눈이 감겨옛 생각에 잠기면 아직도 먼 서쪽이라고 "서쪽서쪽" 우는 새. 홍시 속에 비치는어렴풋한 감씨처럼 이승도 저승도 아닌산그늘만 설핏한 곳 짐승도 우두커니 서서 바람맛을 보는 곳.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5.06.03
강석관의 「겨울 주막」 겨울 주막 강석관 술잔 속에 그가 떠 있다. 그의 별이, 무지개가 떠 있다. 칼칼한 바람소리 속에 몰래 섞여드는 그 목소리 마지막 밤, 마지막 잔을 이별의 절차처럼 마신 겨울 주막에서 그가 놓고 간 술잔 속에 웃음 한 점이 외롭게 남아 겨울보다 더 추운 모습을 하고.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5.02.04
유월을 풀다/ 김민정(시조시인) 유월을 풀다 비에 젖자 하나둘씩 잎새들이 말을 건다어제의 뙤약볕도 나쁜 건 아니었어때로는 목이 탔지만 그도 참아 내야지언제라도 절정이다 이 아침 나팔꽃은나 또한 마찬가지 언제나 절정이다이렇게 푸름이 내게 사무치게 안긴다면-「펄펄펄, 꽃잎」(월간문학 출판부, 2023. 5.)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4.09.02
눈 내리는 마을/ 오탁번 눈 내리는 마을 건넛마을 다듬이 소리가 눈발 사이로 다듬다듬 들려오면 보리밭의 보리는 봄을 꿈꾸고 시렁 위의 씨옥수수도 새앙쥐 같은 아이들도 잠이 든다 꿈나라의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밤마실 나온 호랑이가 다디단 곶감이 겁이 나서 어흥어흥 헛기침을 하면 눈사람의 한쪽 수염이 툭 떨어져서 숯이 된다 밤새 내린 눈에 고샅길이 막히면 은하수 물빛 어린 까치들이 아침 소식을 전해 주고 다음 빙하기가 만년이나 남은 눈 내리는 마을의 하양 지붕이 먼 은하수까지 비친다 - 오탁번 「눈 내리는 마을」, 시인생각, 2013.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3.10.10
편지/ 김남조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런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빛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을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3.10.10
파도 여인숙 외/ 최동호 파도 여인숙 달빛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 여인숙 문간방 파도 소리 문틈으로 엿듣는 귀가 미역줄기처럼 자라 잠 못 드는 나그네 느리게 걷는 고양이 자정 가까운 귀가 시간 동네 네거리 입구에서 차들이 뒤엉켰다. 경적 소리가 아니라 선술집의 불빛이 정적을 비추고 있었다. 잠시 꼬였던 길이 풀려 자동차 핸들을 돌리려는 순간 불룩한 뱃가죽이 처져있는 수척한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리게 걷고 있었다. 라이트 불빛 헤치고 가는 화등잔만큼 눈 큰 고양이에 게 눈길을 주며 서 있었다.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2.11.11
월정리역에서/ 함동선 월정리역에서 함동선 물어 물어서 백리 길을 구십 리 왔건만 나머지 십 리 길이 천 리 같은 걸 길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다 철원 땅 월정리역에 와서 기차표를 끊지 않는 것은 니가 내 안에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늘도 니가 나의 하루를 차지하고 있어 기차표를 끊을 수가 없다 6월 25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들꽃만이 핀 월정리역에서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2.11.08
시월/ 나희덕 시월 나 희 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띄워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 당신이름 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줄 당신이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나희덕(시인, 대학교수) - 1966년 2월..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2.11.06
초승달/ 이기선 시조가 있는 아침 (136) 초승달 중앙일보(입력 2022.08.11 00:19) 초승달/ 이기선(1953∼) 전어를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렸다 칵! 하고 내뱉으니 창문을 뚫고 날아가 저물녘 하늘에 박혔다 구름에 피가 스민다 -한국현대시조대사전 단시조가 다다르고자 하는 세계 미당 서정주 시인은 초승달을 ‘님의 고운 눈썹’으로 보았는데 이기선 시인은 가시로 보았구나. 그것도 목에 걸려 내뱉으니 창문을 뚫고 날아가 하늘에 박혔다니 다누리호보다 빠른 상상력의 힘이로구나. 장마 갠 저물녘 저 하늘이 왜 저리 붉나 했더니 바로 그 가시에 박혀 흘린 피가 스며서였구나. 이기선 시인은 ‘가시’를 소재로 한 시조 한 편을 더 썼다 어매는 입을 가리고 나직이 칵칵 거렸다 알뜰히 살을 발라 내 입에 넣어주고 남은 살 빨아..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2.08.11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우대식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아내의 가슴에서 못 자국 두 개와 일곱 개 선명한 선이 발견되었다 못 자국 두 개의 출처는 내 분명히 알거니 빗살무늬 상처는 진정 알지 못한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해변에서 보낸 나날들의 기록인가 생각해보았다 혹 주막에서 보낸 내 생을 일이 년 단위로 가슴 깊이 간직한 탓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생의 싸움터를 헤매인 것은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왜 저의 가슴에 저토록 선명한 상처의 보고서가 남아 있는가 나 바다에서 죽음을 꿈꾸었을 때 그는 지상에서 죽어갔던 것 우대식 시인 1965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여 숭실대 국문과 졸업하고 아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현대시학』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베두.. 시인방/오늘 또 읽는 시 2022.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