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숙 시인 ‘여름 한기'는 앓아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그 낭패스런 참담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다. 어느 여름, 나는 이별이란 기막힌 추위 앞에 서게 됐다. 확확 단내를 일으키는 바깥 바람으로도 얼어 있는 내 심사를 녹일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에 쌓은 정리와 믿음을 털어내야 할 불운보다 스스로 가누어야 할 이성이나 지혜의 마비에 더욱 못 견디었다. 늘 주변에 널려있던 잠언과 감미로운 음악 속에서도 나는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술의 끊임없는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 속에서 뿐이었다. 체질적으로 술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고, 또 무엇인가의 사건해결을 맑은 생각으로 풀어온 지금까지의 생활습관에 어긋나기도 싫었다. 당면한 상황을 피해버리기보다는 마주보며 앓는 쪽을 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이번엔 마주 바라볼 얼굴조차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탓이었다. 미움이라든가 그런 자각이 있는 이유가 아니었다. 천재지변의 사태가 사물의 상태나 방향을 돌연 틀어버리듯 이별은 서툴고 서두르는 걸음이었다. 철근보다 더 강하게 얽혀 있다고 믿었던 영혼이 흙덩이처럼 순식간에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나에겐 술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이를 통해 고통을 가장 손쉽게 해결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를 미궁으로 데려갈 또는 만취로 인해 스스로를 녹여버릴 매개물이라 믿었기에. 그러나 나는 체질과 성격대로 결국 한 잔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다만 강석관의 「겨울 주막」을 읽으며 취기에 젖곤 했다. 술잔 속에 그가 떠 있다. 그의 별이, 무지개가 떠 있다. 칼칼한 바람소리 속에 몰래 섞여드는 그 목소리 마지막 밤, 마지막 잔을 이별의 절차처럼 마신 겨울 주막에서 그가 놓고 간 술잔 속에 웃음 한 점이 외롭게 남아 겨울보다 더 추운 모습을 하고. 아름다운 시였다. 이별이란 어떻든 불편하고 힘든 것일텐데 괴로움과 슬픔을 극복해 낸 승화는 이렇게 향기로웠다. 그렇다. 정신을 물질의 우위에 두어야 함은, 부서진 물건의 파편들은 영원히 쓸모가 없지만 정신의 편린들은 영원히 쓸모가 있다. 막막한 절망이나 고독은 심성에 깊이 가라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추억이란 정제된 이름으로 떠오른다. 인간이 시간과 타협할 수 있음은 정말 다행이다. 어떤 상처도 시간이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등 돌릴 수 있던가. 나는 그해 가을 어느 저녁녘에 느닷없이 별리 이전의 세월을 감아올렸다. 소용돌이치던 한동안의 감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너무나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온 가슴이 저려왔지만 되도록 천천히 들여다 보았다. 그가 남긴 신성한 그리움의 성역이었기에 그에게 깊이 감사했다. 그리고 오랜 불면과 깊은 눈물을 통해 오랜만에 다시 크신 이 앞에 서게 된 것을 알았다. 마음이 멀어, 보고 듣지 못한 가을이 거기 있었다. 원래의 온유하고 평화로운 제 빛을 이끌고, 제가 가꾼 한해살이만큼으로 물든 잎들은 황홀했고 열매는 알뜰했다. 흙길을 에워싼 잡풀에게서도, 접시꽃과 분꽃, 꽃능금과 금잔화에게서도 촌의 가을 냄새가 났다. 모든 꽃과 나무들은 서늘하고 청결한 바람 속에서 조금씩 흔들리며 서 있었다. 그들은 곧 이 땅에서 사라져 갈 후일 같은 건 괘념치 않았다. 그들은 절기의 빛과 대기를 맘껏 누리며 지상의 삶을 씨앗 속에 동그랗게 말아 넣는 중이었다. 가장 작은 부피로, 그리고 가장 단단하게 생애를 압축하고 있었다. 참 엉뚱한 일이었다. 그 벅찬 느낌 속에서 마실 줄도 모르는 술 생각이 간절했던 것은, 어쩌면 넓은 잔디밭, 산들바람과 나뭇잎 냄새 그리고 해질녘의 우수, 이런 분위기가 내 안에 잠재한 기억 하나를 연결시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그것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에 발을 막 들여놓던 때였다. 어느 가든파티장에서의 일이었다. 그 집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변두리의 산과 들의 배경 속에 들어앉아 흔한 수목들 사이에서 집은 살짝 맑은 얼굴을 보여주듯 했다. 잘 손질된 너른 잔디밭 한 켠에 비단잉어들이 흘러가는 연못도 있었다. 때 맞춰 서서히 내리는 노을, 드문드문 라일락 향기가 끼어들었으니 분명 은혜로운 오월이었을 것이다. 주인 내외분 또한 품위있는 분들이었다. 만찬 또한 풍족했으나 이 모든 분위기를 깨뜨리듯 남자 주인은 줄곧 두 손으로 양주잔을 감싸쥐고 있었다. 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나로서도 양주가 차가워야 되는 것쯤은 아는 터인데. 안타깝게 바라보던 누군가가 드디어 술이 끓기 전에 마시지 않겠느냐는 조크를 했다. 그는 그래도 여전 웃기만 했다. 바로 그때 그의 곁에 다가온 부인으로 인해 의문점은 풀려났다. “이 형편없는 사람의 위가 늘 추위를 탄답니다. 매번 내 더운 사랑이 약이지요.” 그의 부드러운 음성과 따뜻한 눈빛은 지금껏 그의 빛깔과 향취로 내게 남아 있다. 어느 배역 속에서도 강하게 자기 체취를 느끼게 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와 닮았던 건 아니었을까. 신접살림을 차릴 때 나는 크리스탈 잔 두 개를 빠뜨리지 않았다. 잔의 각 면에 와서 꺾이는 빛살을 바라보며 내 마음에 눌러 둔 꽃잎같은 그날을 상기했던 것이다. 아마 나의 미래가 그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숨은 기대는 기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상하게 계속 엇물려 삐걱거리는 남편과의 생활감각들 차이에 나는 슬며시 잔들을 다락 깊숙이 감춰버렸던 것이다. 외려 지우지 못할 한 토막의 드라마를 연출하고야 말았으니 어느 순간 쇳물같이 펄펄 끓어 오르는 절기를 삭히지 못해 남편의 애용주인 위스키를 주발에 쏟아 단숨에 들이킨 사건이다. 나는 기절했던지. 나는 괴로움보다 더한 부끄러움으로 깨어나야 했었다. 이로 인해 남편은 공개적으로 놀려댔다. 술이 여간 센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치기도 세월에 익어든 것인지. 그 여름, 남들처럼 술로 아픔을 달래보려던 흉내를 포기했던건 참 잘한 일이었다. 술맛을 모르는 나지만 술멋이라도 깃들게해야 될 것 같아서다. 기억 속의 아름다운 그 저녁 한 때와 꼭 같을 수는 없지만 그와 맞먹을 만한 자기성찰로 가득찬 한 잔이면 어떨까 싶다. 코르프섬의 사랑과 시의 언덕에서 청옥빛 지중해를 바라보며 마시던 람주 한모금, 로마의 중세기 거리를 홀린 듯 다니다. 창앞에 앉아 나누던 꼬냑은 역사 속으로 치닫는 그리움에 타들어 가는 내 마음의 갈증을 더욱 불 붙게 했다. 그러나 개선문을 눈 앞에 두고 ‘개선문' 속 그날의 주인공들과 재회시키던 칼바도스의 사과냄새는 안개 속으로, 실비 속으로 축축이 나를 적셔 주었다. 또 함부르크의 음산한 저녁을 후둘기던 빗줄기들을 바라보며 떠나온 집과 아이들과 부모님 생각에 잡혀 연거푸 마시던 흑맥주에는 황량함이 있었다. 그와 같은 순간들은 문득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수천리 밖에서 나를 당길 때가 있다. 알 수 없는 애틋함으로 나를 흩뜨릴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 다시 같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일 뿐이다. 내 마음에 고여 흐를 술의 향내일 뿐이다. 누군가의 말대로라면 나는 타고난 곧은 성질 때문에 휘이지 않고 여러 차례 부러진 흔적을 갖고 있다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는 주도를 통해 선인들이 누렸던 관용을 익힌다면 가파른 직선보다 완만한 곡선을 밟아가는 삶의 여유를 꾸려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인생은 짧다. 그러나 술잔을 비울 시간을 아직 충분하다.' 라는 속담을 놓치지 않고, 먼지 쌓였을 두 개의 잔을 꺼내 씻어야겠다. 결코 늦지 않을 미래, 충족한 한 잔을 기다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