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방/박영배 시인 57

10월 장미/ 박영배

10월 장미 설혹 그것이 헛된 몸짓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 알까? 생각난 듯 비 그친 아침 한 잔 커피를 마시며 보내준 눈 맞춤이나 목백일홍 꽃숭어리 터트리는 바람 소리에 열에 뜬 낯붉힘 따위 어줍은 기억만으론 내내 열어 보이지 못한 가슴 사랑한다, 사랑한다 겹겹 짙붉은 꽃잎들로 에두르며 애태운 은유는 남기고 이 장맛비에 씻겨 아픔 하나 떠나려고 하네. - 문학시대 2022년 여름호

의림지 10 -회향/ 박영배

의림지 10 ─회향廻向 박 영 배 햇볕이 눈동냥 와 가물거리는 봄날이다 오늘도 낯이 설은 청와靑蛙 한 마리가 겁 없이 밑 깊은 못물에 연잎 한 장을 띄워놓고 귀만 열어둔 채 슬몃슬몃 가부좌 틀며 앉아 염불 외는 시늉이나 한다고 해 떨어져 울대 부풀면 못 둑으로 튀어 올라 물때 절은 시줏돈 세다가 놀빛 물든 큰 눈알을 굴리면서 웃는 듯 우는 듯하다고 두런거릴 거 없다 도성 안쪽 어디 저잣거리에 공술로 술배 채우며 빈둥대던 그것이 공덕이라도 닦아 나머지 팔자 바꿔보겠다며 냅다 빈 바랑 하나 걸머지고 폴짝폴짝 물소리 쫓아 탁발 수행 떠나더라 입 싸게 전해오는, 겨울 지나 시작된 발이 아픈 생生이었느니. - 문학시대 2022년 여름호

돼지갈비 먹는 법/ 박영배

돼지갈비 먹는 법 박 영 배 참숯이 대세야 십구공탄 위에 석쇠를 덮어도 서둘지는 말고 서늘하게 하룻밤 숙성시켜 군데군데 눈치껏 태워주면 귀맛도 좋고 눈맛 나지 땡고추나 통마늘을 통째 물고 잘근잘근 양념 삼아 함께 깨물어대면 뒤끝을 장담 못 해 석쇠 담뿍 덧널어 놓고 이쪽저쪽 뒤적여봐 몸 사리기 귀찮아져 바싹 다가앉아 눌어붙는 애인보단 애인 없어 옹색한 친구나 을러 입언저리 더러워도 입 안벽 찢을 듯이 짓씹어야 감칠맛 불러내지 선홍빛 불꽃 좀 봐! 우리, 떠나도 눅눅지 않은 곳 있었나 이만한 놀이터 있었나 다시는 누릴 수 없는 이런 날 꽃 그림 앞치마 펼쳐 앞가슴 가리고 술잔 들어 잠깐잠깐 윗몸 앞으로 숙여주면 속 찡한 맛 오래가지 하릴없이 비나 긋는 저녁이면 봄밤 아녀도 좋아. - 문학시대 2022년 여름호

종일 안부만 묻네/ 박영배

종일 안부만 묻네 - 박 영 배 서둘러 귀향했다 들었네 그려 꽃바람 쐬셔! 덩달아 행복해져 나도 모르게 소리쳤네 어디 경칠 일 더 있는가 이 여름 데우며 버티는 역병바람도 그리 만만히 볼 건 아닌 거 같고 어쩌겠나 옆구리는 비워놓고 다가가 슬그머니 말동무라도 청해봐야지 낫살이나 먹어 하는 말이네 머 간절할 게 있나 아차 방심하는 새 싹둑 잘려나가 남긴 것 없이 내팽개쳐진, 가뜩이나 비정한 생生 아닌가 그런데 꽃 이울면 꽃대는 누가 어르지? 봄꽃들 화르르 지고 코로나 볼때기만큼이나 붉어 목백일홍 꽃숭어리 표정 아직 애틋한데 내 철없는 우환들 투정이 심해 종일 안부만 묻네. - 月刊 純粹文學, 통권 344호(2022년 7월호)

산밤은 여물었나요?/ 박영배

산밤은 여물었나요?                                    - 박 영 배 몸은 성한지 표정 먼저 살피셨을 때 미루나무에 걸려있던 흰 구름과 눈이나 맞추고 말았네요  잘 지내고 있어요벌초는 진즉 부탁해 두었어요 산밤은 여물었나요?가을장마가 끝난다고 해요 추석에는 함께 보름달을 볼 수도 있겠네요.                              - 문학시대인회 2021년 사화집

만추晩秋 1/ 박영배

만추晩秋 1 내 나이 막 스물을 넘겼을 때 돈 없고 애인도 없던 날 온통 천지가 휑뎅그렁하여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로 나가 완행버스 무작정 올라타고 가다가 남춘천 어디쯤에서 내려 호숫가 여인숙 뜨끈한 연탄방에 막소주 두어 병 들이켜고 누워 먼저 떼밀려와 졸던 계절, 마른 힘줄 다 빼놓고 꺼멓게 말라붙은 그 속 밤새 바라만 보다가 새벽녘에 황급히 돌아오곤 했지. -시집 「술이나 한잔」 2017

나비가 온다면/ 박영배

나비가 온다면 - 박 영 배 나비가 온다면 발길에 밟힐 것쯤 각오했다 역병 따윈 무섭지도 않아 그러나 이제나저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젖은 숨소리만 출렁거리는 달빛도 비켜선 적막 길 한가운데 금 간 보도블록의 날 선 틈 헤집고 나온 꽃다지는 병든 노모 누워계신 고향엔 걱정이 되어 못 간다 마스크 벗고 소백산으로 갈까 샛강 건너 가까운 밤섬으로 갈까 지도 펴고 취소된 철쭉꽃 축제를 찾을까 나비가 온다면 천한 눈길에도 아찔해지는 봄날 혼자라도 나비가 와준다면. -「포스트 코로나: COVID-19, 희망의 시」, 한국시인협회(2021) 출처: 포토친구(다음갤러리)